상처는 반드시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상처는 영적인 암으로 가지고 있을수록 영혼과 정신 그리고 육체, 더 나아가 삶의 질병을 만들어 냅니다. 내 삶과 인생의 원리가 파괴된 상태, 즉 disorder의 상태가 되버리게 되고, 내 인생을 사용하는 원리를 모르게 되니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육신과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 살다 결국에는 재앙 속에 삶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한 주간 중독재활전문가들과 합숙하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 속에 중독에 잡힌 가족 때문에 고통의 세월을 거쳐왔던 자들이 회복되어 이겨내고 증인으로 강단에 서셨습니다. 나와 우리 가족은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그 어디서도 내 문제를 말하고 또 해답을 얻을 곳 없었다는 고백을 모두다 하셨습니다. 오직 성경 속에 답이 있었고 나는 그 답을 찾아주며 회복의 과정 속에 함께해준 지도자와 함께 이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분들처럼 상처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상담과 치유법을 찾아 해맵니다. 그러나 상처를 받고 주는 세상과 인간의 문제를 인식론의 관점, 즉 철학의 개념에서 바라보기에 해결책도 그 안에서 나오게 됩니다. 각기 세상과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가 생기기에 치유법이 수없이 나오게 됩니다.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해결이 안 되는 우리의 상처는 창3장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배신과 책임전가,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인해 자기가 태어나고 삶을 누리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창4장에는 언약을 오해한 결과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고, 창6장에는 상처는 결국 욕심을 불러와 네피림에 잡히는 결과로 끝이 납니다. 창11장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상처로 남아 또 다시 그런 심판에 쳐해질 것이라는 실체없는 두려움과 불안에 잡혀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의 상처를 대속하실 대속자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온 문제, 질병, 고통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죄속에 빠져 사단에게 소속되버린 죄악 때문에 그 대속자가 우리 대신 찔리셨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모든 것이 병들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우리의 대속자가 되셔여만 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자가 되신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문제를 완전하고 완벽하고 영원히 해결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남은 고통은 더 이상 우리의 것 아니고 나의 주인되시는 변화의 시작이고 우리 상처를 통해 일하고자 하시는 응답의 발판이 됩니다. 서밋으로 부르셨기에 하나님의 계획을 확신하고 말씀의 흐름 따라 천명 이루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대속자가 끝내셨기에 이제는 그분이 알려주신 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더이상 상처는 나의 것 아니고, 축복으로 미래를 알려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끝을 정해놓으셨기에 그것 찾아 쉼없이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처음부터 주셨고,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강조하신 것, 바로 ‘세계복음화’가 ‘끝’ 입니다.
우리 교회의 끝은 성경적 전도운동인 다락방을 하는 교회로, 복음을 치유하고 살리는 것을 강조하는 교회로, 다음 세대에 이 원색 복음을 전달해 그들이 이어가도록 렘넌트 운동하는 교회로, 237나라 5000종족 중에 베트남과 베트남의 54민족을 살릴 교회 입니다. 끝내신 상처 속에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끝을 향해 나아가는 축복의 결단이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