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4(수) - 세 가지 흐름(히브리서 11장 37-38절)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글과 주장을 많이 보고 듣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이것, 저것,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를 지적하며 경종을 울리는 부류
개혁은 이런 것이며 교회는 이래야 한다면서 행동으로 실천하려는 부류
전자는 기차 지나가는데 소리만 치는 격 같고, 후자는 다른 종교와 차이점이 없어지는 것 같다.
전체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기는 역부족인거 같아 보인다.
목회자들은 사역비를 받지 못해 또 다른 업을 가지고 목회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은 상식이 되어버렸다.
중직자들은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은 알고 있지만 그 사명 감당할 힘과 재력 없는 사람들로 변해버렸다.
평신도들과 우리 후대들은 세상 문화의 거센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신앙 우선의 삶에서는 멀어져 있다.
예전 유럽이나 미국이 겪었던 현상을 이제 우리도 겪는 것이라 생각이 되는가?
재앙의 흐름에 우리는 갇혀 있는 것이다.
실상은 흑암의 흐름이다.
결국 멸망의 흐름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일게다.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있는 모든 현장에서 말씀운동이 일어났다.
안식일에만 모인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모여 예배하고 교제했다.
제사장들만 예배하고 학자들만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평신도들이 성경들고 현장으로 나갔다.
매일, 항상,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누리고 복음을 선포했다.
초대교회의 참 모습은 그것이다.
가는 곳마다 빛을 비추어대니 흑암은 발 붙일 틈을 찾지 못했다.
재앙은 그렇게 막아졌고, 흑암의 흐름은 그렇게 바뀌었던 것이다.
재앙의 흐름이 나와는 멀다 느껴지는가?
당해봐야 알겠는가?
불평과 불만, 시덥지도 않은 일로 인생을 허비하며 자기 앞에 닥쳐온 재앙도 보지 못하는 그런 흐름에서 빨리 벗어나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붙들고 현장에 일어나는 재앙 막는 전도자를 찾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이면 완전하고 완벽하고 충분하다는 그런 성도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증거하는데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되는 제자를 필요로 하신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다.
그들을 보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라 칭했다.
나와 그대가 그렇게 되기를 소원한다.
“불평과 불만만 내 안에서 올라옵니다. 감사할 것도 많은데 말입니다. 내 눈을 열어주셔서 가까워진 재앙을 보고 그 흐름을 바꾸는 전도자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날마다_다락방
#불신자만나_복음_설명하는_것_그것보다_재미진것_없다
#다들_가는_길로_가지_않으련다
#아무도_가지_않아도_나는_그_길을